ㅣ서문 그리고 감사의 말ㅣ
책은 평생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생각을 반영할 때가 많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교양교육은 내가 연구해 왔던 환경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내 연구의 주요 관심사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의 교양교육 경험은 깊고도 넓다. 학부생 때부터 대학원생, 전임교수 그리고 객원학자가 될 때까지 교양교육을 지속해 왔고, 나의 분야는 철학, 특히 교육철학이었다. 나는 한 명의 졸업생, 학과장, 부학장, 학장, 이사, 워크숍 진행자, 자문가로서 교양교육의 전망을 명확히 하고 교양교육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위해 의사결정을 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상황에 참여해 왔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나의 경험은 일천하다. 나는 항상 대학교육 수준에서만 일해 왔고 미국 안에서만 학문 활동을 해 왔다. 그리고 소규모의 독립적인 교양교육대학에서 주로 ‘전통적인’ 학부생들과 함께 일해 왔다(때로 나는 성인 학부생들, 전문과정의 대학원생들, 교양과정의 석사 학생들 그리고 전문개발 프로그램에 참가한 고위 학교 행정가들을 가르치는 기쁨을 누린 적도 있긴 하다). 그리고 나는 교양교육이 활발한 곳에서 일하는 특권을 누려 왔다.
먼저 내 얘기부터 간략히 시작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독자들이 이 책에 반영된 내 경험의 장점과 한계(나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를 발견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런 사실들을 처음부터 밝히는 편이 더 좋겠다. 둘째로, 이 책을 쓰겠다는 결정과 이 책에 포함된 생각들은 수년 동안 품어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이다. 더욱이 이 책은 철학적인 연구, 특히 교육이론에 관한 연구이지만, 수십 년간의 행정 경험과 교육실천을 바탕으로 했다.
세 번째 이유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교육철학 분야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시도이다. “오늘날 교육이 직면한 모든 문제들, 특히 교양교육의 생존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위협요소가 있는데도” “왜 우리가 비현실적인 철학적 관념에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가”라고 그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바로는 철학이 제도나 프로그램의 전망을 밝혀줄 뿐 아니라 일상의 의사결정에도 중요하다. “이것이 좋은 교육인가”는 모든 제도적 결정을 하는 데 좋은 질문이다. 나는 교육자 모두가 명료한 생각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실천에 대해 개인과 집단이 하는 철학적 반성의 습관-목표와 가정에 대한 명료화, 가치와 책무에 대한 명료화, 차이의 선명화, 대화에서의 배움, 그리고 혁신 가능성의 여지 개방-을 권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얻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평을 기다리고 있는, 그래서 마침내 필연적으로 계속 진행 중인 연구이다.
이 책은 4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입부에 이어, 1부의 두 장에서 나는 교양교육에 대한 현대 담론의 혼란을 논의하고 교양교육의 개념을 이론과 실천의 중요한 전통으로 해석했다. 이 설명이 충분히 명료하기를 원하지만 많은 다른 역사적 개념을 수용하기에는 일천하다. 2부는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경향이나 패러다임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때 경향이나 패러다임들은 이론과 실천의 특성을 나타내고 전통의 역동성을 빚어낸다. 3부에서는 교양교육의 핵심 개념, 가치관 그리고 도덕적 함의를 다룰 것이다. 4부는 교양교육을 방해하는 지속적인 장애요소들과 시대적 위협요소들을 숙고해 보고, 현재 세계에서 교양교육의 위치와 전망을 다루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나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여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의 공적이고 현재적인 견해까지 철저히 모두 포함하여, 교육자와 철학자 그리고 학회가 만들어 낸 폭넓은 개념 안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이 책은 철학적 탐구서이다. 이 책의 목적은 특정한 형태의 교육과정, 교육방법, 제도적 실천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이 책은 교육의 역사도, 교육정책에 대한 논쟁도, 교사를 위한 지침도, 행정가의 편람도, 교육의 현 상태에 대한 비판도, 개인의 회고록도 아니다. 이런 글을 찾는 사람들은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절한 교육이론이란 제도적 환경, 학습자공동체, 공동교육과정, 형식적 교육과정의 내용, 수업방법, 그 외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여, 교육적 실천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더욱이 나는 종종 교육자의 관점뿐만이 아니라 학습자의 관점도 취한다.
이 책의 주된 개념과 논거 중 몇 가지는 최근 발간된 두 논문에 처음 실었다. 나는 이 두 논문을 많이 인용하였다. 비록 논문의 표현들이 가끔 글의 전개상 많이 바뀌었지만, 몇몇 문장들은 글자 그대로 또는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 첫 번째 논문은 조셉 데비티스Joseph DeVitis와 시안롱 유Tianlong Yu, 피터 랭Peter Lang이 편집한 인성과 도덕교육Character and Moral Education에 실린 “교양교육과 도덕교육Liberal Education and Moral Education(2011, 179-92)”이다. 나는 이 글을 작성하라고 요청한 조셉 데비티스와 이 책에 그 글의 일부를 실도록 허락해 준 피터랑 출판사Peter Lang Publishing에 감사한다. 두 번째 논문은 “교양교육에서 친구, 적, 그리고 넬 나딩스Friends, Foes, and Nel Noddings on Liberal Education”이다. 이 글은 2011년 4월 교육철학회Philosophy of Education Society의 일반 세션에서 발표한 논문으로, 이 학회에서 나는 넬 나딩스Nel Noddings의 기품있는 반응 덕택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나딩스의 반응 덕에, 이 논문은 롭 쿤즈만Rob Kunzman이 편집한 교육철학 2011Philosophy of Education 2011(Carbondale, IL: PES, 2012)에 출간 예정이다.
지적 빚은 쌓여가고 절대로 다 갚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빚은 매우 감사한 선물이다. 이번에 빚은 정말로 컸고, 나는 감사의 인사를 공적으로 표현할 기회를 얻어 기쁘다. 오하이오대학의 학부생 멘토 트로이 올간Troy Organ, 스탠리 그린Stanley Green 외 많은 사람들; 하버드대학 대학원의 멘토 이스라엘 쉐플러Israel Scheffler, 존 롤즈John Rawls, 로드릭 퍼스Roderick Firth, 제인 롤랑 마틴Jane Roland Martin 외 많은 사람들; 롤링스대학과 게티스버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관대하고 명석한 동료들; 대학 행정업무를 함께 해 준 현명한 전문가들; 이 일을 하도록 용기와 기회를 준 학문의 멘토인 롤링스대학의 대데우스 시모어Thaddeus Seymour, 게티스버그대학의 고든 하란드Gordon Haaland; 여기에 이름은 없지만 만나서 기쁘고 절대 잊을 수 없었던 많은 철학자들과 친구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대학신문기금Provost’s Professional Papers Fund과 교수연구기금Faculty Research으로 이 연구를 지원해 준 게티스버그대학도 감사하다. 또 순조롭게 전문가의 역량을 발휘해 준 편집장 데이비드 바커David Barker와 출판사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글을 고치는 것을 포함해 많은 일을 맡아준 내 아내 써니Sunni에게 작으나마 공을 돌린다. 그러나 이 책의 실수나 잘못된 진술 그리고 결함은 오직 나의 책임일 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배우는 자로서 자세를 잃지 않은 나의 선생님들과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나의 학생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단언컨대, 인류역사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교사와 학생이 역사를 오랫동안 계속 계승하기 때문이다.
ㅣ역자 서문ㅣ
이 책의 핵심 용어인 ‘flourish’와 ‘flourishing’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가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어떻게 옮기면 좋을지,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 보았다. 국내에서는 이 단어를 ‘잘 됨’, ‘잘 되어감’, ‘잘 삶’, ‘번영’, ‘풍요’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플러리시’, ‘플러리싱’이라고 그대로 옮겨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미국인 교수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가장 적절한 말이 무엇일지, 좀체 해결하지 못했다. 사실 국내에서 번역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다 나름의 적절함이 있다. 한편 한계도 있었다. 여러 번의 고민과 논의 끝에 ‘행복’으로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다이모니아eudaimonia가 자신이 말하는 flourishing이며, 이는 주관적 상태의 행복만이 아니라 탁월함을 추구하는 활동을 포함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flourish, flourishing은 단순히 추구하는 활동만이 아니라, 결과로서 최종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최고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를 번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행복이기에, ‘flourish’, ‘flourishing’을 ‘행복하다’, ‘행복’으로 옮겨 쓰기로 했다. ‘행복’이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뜻은 문맥에 따라 잘 성장하고 번영하고 잘 된다는 의미로 표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행복’이라는 단어로 옮겨 썼다. 저자의 flourish, flourishing과 구분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다이모니아는 ‘행복eudaimonia’으로 표시했다. 이 저서에서 저자는 교양교육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보았다.
대학 담장 밖에서는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학에서는 관련 학과들이 폐과를 당하는 등 인문학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인문학이 대학 담장 넘어 세상으로 나온 듯하지만, 제 자란 곳을 다 부수고 세상으로 불려나온 인문학은 불안하다. 유행처럼, 상품처럼,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한 도구처럼 소환당하고 있는 인문학은 모든 인간의 존엄보다는 또 다른 인간 차별화를 부추기지나 않을까 불안하다. 또 다
ㅣ역자소개ㅣ
■ 손 종 현
人材교육체제 연구팀 연구책임자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 강 이 철
人材교육체제 연구팀 공동연구원
경북대학교 교수
■ 김 규 원
人材교육체제 연구팀 공동연구원
경북대학교 교수
■ 김 부 태
人材교육체제 연구팀 공동연구원
경북대학교 국제교류원
■ 이 경 숙
人材교육체제 연구팀 전임연구원
대구가톨릭대학교 객원연구교수